미국과 이란이 서로 사이가 안좋은 이유 (팔레비왕조, 호메이니혁명, 미국관계)


솔직히 저는 이란과 미국이 왜 이렇게 앙숙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뉴스에서는 늘 이란을 '적대국'으로만 표현하지, 그 배경을 깊이 다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란의 현대사를 찬찬히 들여다보니, 단순히 '악의 축'이라는 프레임으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역사적 맥락이 있었습니다. 특히 1979년 이란 혁명 이전까지 이란은 미국의 가장 든든한 중동 동맹국이었다는 사실은 제게 적잖은 놀라움이었습니다 


팔레비왕조와 석유의 발견

이란은 2천 년 동안 페르시아(Persia)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여러 왕조를 거쳐왔습니다. 그러다 1908년, 중동에서 최초로 유전이 발견되면서 이란의 운명은 급격히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유전 발견 이후 영국이 재빠르게 개입했고, 1925년 팔레비 1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본격적인 근대화 정책이 시작됩니다.

팔레비 1세는 서구식 근대화를 강력하게 추진했습니다. 철도를 깔고, 히잡을 금지하며, 여성 차별을 철폐하는 등 당시로서는 상당히 진보적인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2차 대전 중 영국의 참전 요구를 거부하자, 영국과 소련이 연합해 팔레비 1세를 강제로 폐위시켰습니다. 이후 그의 아들 팔레비 2세가 왕위에 올랐지만, 이미 그는 영국의 꼭두각시나 다름없었습니다.

제가 이 대목에서 느낀 점은, 아무리 개혁을 추진해도 외세의 압력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이었습니다. 팔레비 1세는 나름대로 자주적인 왕이었지만, 결국 석유라는 자원 때문에 외세에 의해 쫓겨났습니다. 자원의 축복은 때로 저주가 되기도 한다는 역설을 실감했습니다.

모사데크 총리와 CIA의 개입

1951년, 이란 정치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인 모사데크(Mosaddegh)가 총리로 선출됩니다. 그는 팔레비 2세를 몰아내고 공화국을 세우려 했으며, 영국이 장악하고 있던 석유 시설을 국유화(Nationalization)한다고 선언했습니다. 국유화란 민간이나 외국 기업이 소유한 자산을 국가가 소유권을 가져오는 것을 뜻합니다. 쉽게 말해, '우리 땅에서 나는 석유는 우리 것'이라고 선언한 셈입니다.

모사데크는 전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민주주의적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저는 그를 '이란의 김구'라고 불러도 손색없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대로 개혁이 이어졌다면 이란은 지금쯤 중동 최고의 민주주의 국가가 됐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영국은 이를 용납할 수 없었고, 미국에 도움을 요청합니다.

처음에 미국은 거절했습니다. 당시는 한국전쟁이 한창이었고, 중동까지 개입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국은 한 가지 치명적인 말을 꺼냅니다. "모사데크가 기업을 국유화하려 한다. 이건 공산주의다." 이 한마디에 미국은 태도를 바꿨고, CIA가 사상 최초로 해외 쿠데타 공작에 나섭니다(출처: CIA 공식 문서).

1953년, CIA는 이란 군부 내 친미 장성들을 매수해 쿠데타를 일으켰고, 모사데크는 강제로 끌려 내려와 가택연금 상태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제가 이 사건을 보면서 가장 분노했던 부분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지도자가 외부 세력에 의해 제거됐다는 점입니다. 이후 이란이 미국을 신뢰하지 않게 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호메이니 혁명과 미국과의 결별

모사데크가 물러난 후, 팔레비 2세는 이제 미국에 완전히 종속됩니다. 1970년대 테헤란 거리는 미국 할리우드를 방불케 할 정도로 서구화됐고, 여성들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다녔습니다. 실제로 1971년 테헤란 사진을 보면 지금의 이란과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심지어 서울에 '테헤란로'가 생긴 것도 이 시기, 양국이 친미 동맹국으로서 우호 관계를 과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석유로 벌어들인 막대한 오일머니(Oil Money)는 왕족과 소수 특권층에게만 집중됐고, 빈부격차는 심화됐습니다. 오일머니란 석유 수출로 얻은 막대한 외화 수입을 뜻합니다. 쉽게 말해, 이란은 돈은 많이 벌었지만 국민은 가난했던 겁니다. 1978년, 반정부 시위를 하던 시민들이 모인 렉스 극장에 누군가 불을 질러 420명이 사망하는 끔찍한 사건이 벌어지면서, 전국적인 항쟁이 시작됩니다.

팔레비 2세는 도망쳤고, 오랜 망명 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호메이니(Khomeini)가 1979년 이란 이슬람 공화국을 선포합니다. 이때부터 이란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호메이니는 "미국은 악이다, 이스라엘은 작은 악이다"라고 선언하며, 이스라엘 대사관을 폐쇄하고 그 자리에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대사를 앉혔습니다.

1979년 11월, 테헤란 대학생들이 미국 대사관을 점거하고 직원 52명을 444일간 인질로 잡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미국은 델타포스를 파견했지만 작전은 실패했고, 이 사건으로 카터 대통령은 재선에 실패합니다. 저는 이 사건을 단순한 외교 갈등이 아니라, '감정의 균열'을 만든 사건이라고 봅니다. 국가 간 갈등은 이해관계로 시작되지만, 시간이 지나면 감정과 기억이 쌓이면서 더욱 복잡해집니다.

1980년, 이웃 이라크가 갑자기 이란을 침공합니다. 사담 후세인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8년간 전쟁을 벌였고, 미국은 심지어 1차 대전 이후 금지된 독가스까지 이라크에 제공했습니다. 이 전쟁으로 양국 사상자는 100만 명에 달했습니다(출처: 한국일보). 이란 입장에서는 자국을 지키기 위해 싸웠을 뿐인데, 미국이 배후에서 이라크를 지원한 셈입니다.

이란이 핵개발에 나선 것도 이 시기 이후입니다. 사방이 적인 상황에서, 스스로를 지킬 수단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겁니다. 물론 핵개발이 정당화될 수는 없지만, 이란의 입장에서 보면 '생존 전략'이었다는 점도 이해는 됩니다. 저는 이 과정을 보며, 국제정치에서 자원이 얼마나 큰 변수인지, 그리고 한 번의 외세 개입이 수십 년의 불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지금 이란과 이스라엘, 미국의 갈등을 이해하려면 최소한 이 역사적 배경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한쪽만 악이고, 한쪽만 선이라는 프레임으로는 현재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 글을 쓰면서, 힘 있는 쪽이 언제나 악행을 저지른다는 역사의 패턴을 다시 한 번 확인했습니다. 중요한 건 균형 잡힌 시각으로 상황을 바라보고,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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