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북방개척과 훈민정음 역사와 견해

1443년 12월 30일,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압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세종이 압록강과 두만강 국경선을 확정하며 겪었던 고민과 희생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 역시 단순히 '4군6진을 설치했다'는 사실만 알았지,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강제로 이주당했고, 얼마나 큰 반발이 있었는지는 최근에야 제대로 이해하게 됐습니다. 이 글에서는 세종의 북방 정책이 어떻게 진행됐고, 왜 그토록 논란이 됐는지, 그리고 그 선택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압록강과 두만강, 왜 포기할 수 없었나

세종 시대 조선의 북방은 말 그대로 무법지대였습니다. 압록강 너머에는 여진족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평상시에는 조선에 조공을 바치며 '형님 나라'라고 부르다가도, 식량이 떨어지면 얼굴을 바꿔 국경을 넘어와 조선 백성을 약탈했습니다. 당시 조정 신하들 사이에서는 "차라리 북방을 포기하자"는 의견이 나올 정도로 골치 아픈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종은 단호하게 거부했습니다. "한 치의 땅도 넘길 수 없다"는 선언과 함께, 1432년 최윤덕 장군에게 15,000명의 정규군을 주어 여진족을 토벌하도록 명령합니다. 최윤덕은 대마도 정벌에도 참여했던 베테랑 무장으로, 명나라 사신들이 사냥용 매를 요구하며 조선 민가의 개를 끌고 갈 때 몰래 풀어줄 정도로 백성을 아끼는 인물이었습니다(출처: 한국관광공사).

이 작전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압록강 이북의 여진족은 궤멸됐고, 세종은 이 지역에 4개의 행정구역, 즉 4군을 설치합니다. 여기서 '군'이란 우리가 아는 영동군, 거창군 같은 행정 단위를 뜻합니다. 이미 군사적 위협이 사라진 지역이었기 때문에 정식 행정구역으로 편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 두만강 지역은 상황이 달랐습니다. 여전히 여진족의 침입 위협이 있었기 때문에, 세종은 이곳에 6개의 진(鎭), 즉 군사기지를 설치합니다. 이것이 바로 '6진'입니다. 진이란 군사기지를 뜻하는 용어로, 행정구역인 군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세종은 이 임무를 위해 김종서라는 인물을 두만강 지역으로 파견하는데,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김종서가 무장이 아니라 유학자 출신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김종서의 두만강 개척과 사민정책의 그림자

세종이 김종서를 선택한 이유는 명확했습니다. 이미 현장에는 이징옥이라는 유능한 무장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문(文)'으로 그 지역을 통치할 브레인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서로를 무시하던 두 사람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의 능력을 인정하고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김종서가 부임한 뒤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두만강 지역은 공식적으로는 조선 영토였지만, 실제로는 여진족이 더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김종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인을 강제로 이주시키는 '사민정책(徙民政策)'을 시행합니다. 사민정책이란 백성을 강제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뜻하는 용어로, 현대적 기준으로는 명백한 인권 침해입니다.

구체적으로는 함경도에 살던 주민들을 북쪽 국경 지대로 강제 이주시키고, 비어버린 함경도에는 충청도·전라도·경상도 주민들을 다시 강제로 이주시켰습니다. 당연히 백성들의 반발은 엄청났습니다. 실제 기록에 따르면 뇌물을 바쳐 이주 대상에서 빠지려는 사람, 심지어 손을 자르는 자해까지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1. 함경도 주민을 두만강 국경 지대로 강제 이주
  2. 비어버린 함경도에 삼도(충청·전라·경상) 주민 강제 이주
  3. 혹독한 기후와 미개척지로 인한 극심한 원성
  4. 뇌물, 자해 등으로 이주 회피 시도 빈발

조정 신하들은 세종에게 "백성들이 너무 고통받고 있으니 다시 원래 고향으로 돌려보내자"고 건의했습니다. 하지만 세종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자고로 임금이란 백성들의 칭찬만 받을 수 없다. 원성도 들어야 하는 자리다." 이 발언은 세종의 냉철한 현실주의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가 얼마나 큰 부담을 느끼고 있었는지 드러냅니다.

개인적으로 이 대목에서 가장 복잡한 감정을 느낍니다. 세종을 '완벽한 성군'으로만 기억하는 것은 오히려 그의 진짜 고민을 가볍게 만드는 일이 아닐까요. 그는 분명 백성을 사랑했지만, 동시에 국가의 안위를 위해 일부 백성의 희생을 감수해야 했던 통치자였습니다. 이것이 리더의 숙명이라고 해야 할까요.

훈민정음 창제, 혼자 만든 혁명

1443년 12월 30일,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만들었다고 알고 있지만, 실록 기록을 보면 전혀 다릅니다. 훈민정음 반포 이전에는 그 어떤 관련 기록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만약 집현전 학자들이 참여했다면,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는 실록에 분명히 흔적이 남았을 것입니다.

결정적 증거는 최만리의 상소입니다. 최만리는 당시 집현전의 실질적 리더였는데, 세종이 훈민정음을 발표한 직후 달려가서 강력하게 반대하는 상소를 올립니다. 만약 집현전이 함께 만들었다면, 최만리가 사전에 막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발표 후에야 알았고, 그래서 격렬하게 항의한 것입니다.

최만리가 반대한 이유는 명확했습니다. 첫째, 독자적인 문자를 만드는 것은 중국을 섬기는 사대 정신에 어긋난다. 둘째, 한자를 버리고 독자 문자를 쓰는 것은 스스로 오랑캐가 되는 것이다. 셋째, 한자는 수천 년간 잘 써왔는데 굳이 새 문자가 필요한가. 넷째, 쓸데없는 문자는 학문과 정치를 어지럽힐 뿐이다. 심지어 최만리는 한글 글자 모양을 보고 "지렁이 같다"며 "서커스 같은 기예에 불과하다"고 혹평했습니다.

세종은 평소 신하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편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달랐습니다. 최만리를 불러 강하게 질책했고, 훈민정음 창제를 밀어붙였습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세종의 진짜 용기를 봅니다. 훈민정음은 단순한 문자가 아니라, 권력 구조를 뒤흔드는 혁명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문자는 권력 그 자체였습니다.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사람만이 지식을 독점하고 사회를 지배할 수 있었습니다. 세종은 그 권력을 백성에게 나눠주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이것은 기득권층의 맹렬한 반발을 불러올 수밖에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세종이 이를 밀어붙인 이유는, 단순한 애민 정신을 넘어 '백성이 스스로 생각하고 표현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저는 해석합니다.

1997년 유네스코는 훈민정음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습니다. 전 세계 7,000여 개 문자 중 언제, 누가, 어떤 목적으로 만들었는지 명확히 알려진 유일한 문자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것을 국왕이 백성을 위해 만들었다는 점에서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사건입니다.

세종의 선택을 돌아보면, 결국 그는 '완벽한 성군'이 아니라 '고민하는 인간'이었습니다. 북방 개척을 위해 백성을 강제 이주시키는 냉혹한 결정을 내렸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원성을 들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백성이 글을 읽고 쓸 수 있도록 문자를 만들어 권력을 나눠주는 혁명적 결단도 내렸습니다. 이 모순된 두 얼굴이야말로 세종을 진정으로 위대하게 만드는 요소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그를 신격화할 게 아니라, 그가 마주했던 딜레마와 그 안에서 내린 선택의 무게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이 역사를 배우는 진짜 이유일 테니까요.

---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puLpEj5wYkA&list=PLnsvxagVw5MdsCc0p3AhbY23UWCp3JeFk&index=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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